공백은 실패가 아니라, 아직 설계되지 않은 시장이다
“왜 하필 알제리인가요?”
이번 출장을 준비하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입니다. 사실 비행기에 오르기 전까지 기대보다는 걱정이 앞섰습니다. 까다로운 비자 절차, 턱없이 부족한 정보, 그리고 아프리카라는 단어가 주는 막연한 선입견까지. 매년 수많은 나라와 도시를 오갔지만 이번만큼은 결코 가벼운 마음으로 나설 수 없었습니다.
공항에 내려 처음 마주한 풍경은 1980년대식 구형 자동차들이 도로를 메운 모습이었습니다. 마중 나온 차량은 적산거리가 60만 킬로미터를 훌쩍 넘긴 중고 현대차였습니다. 덜컹거리는 시트에 몸을 실으니 마치 시간이 멈춘 과거의 한국으로 돌아간 듯한 기이한 낯섦이 밀려왔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루 이틀 일정을 소화하다 보니, 그 낯섦은 금방 의구심이 아닌 확신으로 바뀌었습니다. 실제 공백이란 누군가의 실패가 아니라, 아직 설계되지 않은 기회일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알제리는 제가 알던 시장이 아니었습니다. 동시에, 아직 그 누구도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시장이기도 했습니다.
흔히 알제리를 가난한 아프리카 국가로만 오해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달랐습니다. 알제리는 GDP 기준 아프리카 전체 3위권에 드는 상위권 국가이자, 북아프리카의 실질적인 경제 강국입니다. 현장에서 제가 마주한 비즈니스의 본질은 단순한 돈의 유무가 아니라, 그들이 가진 독특한 시장 구조였습니다.
처음엔 길거리 곳곳을 삼엄하게 메운 경찰들과 경직된 분위기 탓에 '여기가 혹시 공산주의 국가인가?' 싶을 정도로 시스템이 무겁게만 보였습니다. 하지만 현장을 파고들며 알게 된 사실은 조금 달랐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공산주의라기보다, 오랜 기간 이어져 온 권위주의 체제와 국영 기업 중심의 경제 구조가 만든 특유의 리듬이었습니다. 결정이 나기까지는 확실히 느립니다. 하지만 방향이 한 번 잡히면 무서운 속도로 움직입니다. 이 리듬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은 기회가 없다며 서둘러 발길을 돌리겠지만, 구조를 설계하는 사람에게는 그 느림 자체가 가장 견고한 진입장벽이 됩니다.
소통은 또 하나의 거대한 장벽이었습니다. 130년간 이어진 프랑스 식민지의 영향으로 이곳은 불어와 아랍어가 공존합니다. 영어만으로는 비즈니스 미팅의 깊이를 담보하기 어렵고, 한국어만으로는 현지 시장의 리듬을 온전히 읽어내기 힘듭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높은 장벽이 제게는 가장 확실한 기회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알다시피 캐나다는 영어와 불어를 공용으로 사용하는 국가이고, 저희는 프랑스를 기반으로 유럽 유통망을 가장 깊게 연결해 온 저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연장선에서 보니 알제리는 더 이상 낯선 단독 시장이 아니었습니다. 프랑스와 캐나다, 그리고 북아프리카를 하나의 호흡으로 잇는 확장 거점이었습니다. 실제 이번 출장은 멀리 가는 여정이 아니라 마치 흩어져 있던 점들을 잇는 연결의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이번 방문은 COSMETICA 주최 측과 알제리 정부의 공식 초청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초청장을 보내는 과정부터 비자 신청, 실제 현장 운영까지, 주최 측이 쏟은 정성은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아주 작은 부분까지 세심하게 챙기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저 역시 이 시장의 진심으로 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디든 정성을 다해 준비한 곳은 결국 그 실력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시장도,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지 유통사들과 수많은 미팅을 하며 확인한 것은, 그들 역시 북미와 유럽을 ‘메이저리그’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욕심이 없어서 못 가는 게 아닙니다. 다만 글로벌 스탠다드를 통과시키는 준비가 아쉬웠습니다. 패키징, 가격 질서, 유통 구조, 그리고 무엇보다 일관된 브랜드의 방식이 글로벌로 뻗어 나갈 구조로 잡혀 있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단순히 제품을 사고파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매년 행사의 구조와 비즈니스 흐름 자체를 함께 설계하는 인큐베이팅 파트너로서 접근했습니다.
성과는 예상보다 빠르게 나타났습니다. 현장에서 프랑스 기업 두 곳과 즉각적인 계약을 체결했고, 알제리 최대 기업인 Faderco와의 협업 가능성도 구체화했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부 및 유통망과의 연결은 이번 여정의 범위를 대륙 전체로 넓혀준 예상 밖의 수확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한 번의 악수가 아닌 그 악수가 만드는 다음 과정입니다. 이번 전시장에서 맺은 인연은 2월 파리 미팅으로, 그리고 3월 이탈리아 파트너들과의 재회로 이어지는 하나의 흐름이 되었습니다. 전시장에서의 만남이 계약서가 되고, 그 계약서가 다시 다음 도시의 미팅으로 이어지는 이 선순환. 결국 시장은 운이 아니라, 설계된 흐름을 타고 열리게 됩니다.
그럼에도 이번 출장에서 가장 놀라웠던 사실은 따로 있었습니다. 전 세계가 K-콘텐츠를 이야기하는데도, 알제리 시장에는 ‘한국 제품군’이 거의 비어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유가 있습니다. 관세와 통관, 물류, 결제, 라벨 표기, 유통 구조까지 하나하나가 쉽지 않은 과정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부분 새로운 시장 진출에 대한 시도를 미루거나 가장 쉬운 검증된 채널로만 우회합니다.
하지만 모두가 몰리는 곳은 이미 경쟁의 규칙이 정해진 곳입니다. 반대로, 아직 규칙이 정해지지 않은 곳은 규정을 통과시키는 순서부터 물류의 리듬까지 우리가 먼저 기준을 만들 수 있는 자리입니다. 씨를 뿌리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남들이 못 넘은 장벽이 결국 우리의 진입장벽이 되기 때문입니다.
실제 여러 나라를 다니며 비슷한 장면을 자주 봅니다. K-콘텐츠는 화제인데, 막상 현지 식당가를 보면 대중화된 것은 여전히 일식과 중식인 경우가 많습니다.
반짝이는 관심은 금방 찾아오지만, 실제로 그 나라에 뿌리를 내리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반짝 유행을 오래가는 실력으로 바꾸는 힘은 결국 현장에 있습니다. 누가 먼저 탄탄한 유통 구조를 설계하고, 어떤 파트너와 함께 확실한 판매 증거를 쌓아 나가느냐에 따라 진짜 승패가 갈리는 법입니다.
그리고 오늘도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집니다. “남들이 만들어 놓은 판에서 경쟁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먼저 기준을 세울 것인가.”
알제리는 절대 쉬운 시장이 아닙니다. 인프라도, 속도도, 관성도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매력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준비하고, 구조를 갖추고, 씨를 뿌리는 사람에게 이 공백은 가장 달콤한 기회가 될 것입니다. 실제 이번 출장에서 그 가능성을 정보가 아니라 현장으로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그 확신은 앞으로의 선택을 더 선명하게 만들어 줄 겁니다.
공백은 실패의 흔적이 아니라, 아직 설계되지 않은 기회의 증거입니다. 그리고 그 공백 위에 새로운 기준을 그려내는 일은 결국 멈추지 않고 움직이는 사람만이 완성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