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건 어렵고, 남는 건 더 어렵다
캐나다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그 전에 한국에서 몇 달간 고등학교를 다닌 적이 있습니다. 하루 종일 공부하고 야간 자율학습까지 이어지던 그 분위기, 경쟁이 일상인 하루하루가 지금도 선명합니다. 한국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모두 비슷한 기억이 있을 겁니다. 고등학교 때는 숨이 찰 정도로 공부하고, 대학도 어렵게 들어갑니다. 그런데 막상 들어가고 나면, 졸업은 상대적으로 수월한 편이죠. 물론 예외는 많지만, 전체적으로는 입학이 더 어렵고 졸업은 비교적 쉽다는 인상이 남습니다.
캐나다와 미국을 포함한 서구권 교육은 종종 정반대로 느껴집니다. 명문대는 어디든 들어가기 어렵지만, 한국처럼 입학 자체가 모든 걸 결정해 주진 않습니다. 대신 진짜는 그 다음입니다. 과제와 토론, 팀 프로젝트를 거치며 성적을 유지하고, 매 학기 스스로 증명해야 합니다. 결국 살아남고 끝까지 버티며 졸업하는 게 훨씬 어렵습니다. 입학은 시작일 뿐이고, 졸업은 구조와 체력의 문제입니다.
한국 브랜드들과 상담하다 보면 가장 많이 듣는 요청이 있습니다. “현지 대형마트나 메인 유통 채널에 바로 연결해 주세요.” 누구나 그걸 원하고 충분히 이해하는 부분입니다. 한 번 들어가면 모든 게 해결될 것처럼 보이니까요. 마치 명문대 합격 통지서처럼, 그 한 장이 미래를 보장해 줄 것 같은 착각이 생깁니다.
하지만 현장에서 실제로 더 어려운 건 입점이 아닙니다. 입점 후 살아남는 것, 그리고 더 정확히는 살아남으면서 확장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많은 브랜드가 입점 전 자료와 미팅 준비는 해도, 정작 입점 후에 요구되는 운영 체력을 준비하지 못합니다. 2차 발주를 만들 재고 및 리드타임, 가격 질서를 지킬 채널 룰, 프로모션 가드레일, 클레임 대응, 그리고 매장에서 “왜 이 제품을 다시 꺼내야 하는지”를 설명해줄 콘텐츠까지. 이게 없으면 첫 발주는 나와도 그 다음이 막혀 버립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입점은 성과가 아니라 리스크가 됩니다.
실제 2년 전, 미국 최대급 메인스트림 유통 채널 바이어와 어렵게 연결된 적이 있습니다. 한국까지 함께 방문했고, 브랜드사도 처음에는 모든 걸 지원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실무 단계로 들어가니 의사결정이 엉키고, 준비된 자료와 실제 대응이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가격 및 물류, 그리고 일정에 대한 답변이 흔들리면서 제가 중간에서 수습하는 상황이 반복됐습니다. 결국 바이어 입장에서는 브랜드만이 아니라 공급 구조 자체를 신뢰하기 어렵게 되었고, 관계는 손상됐습니다. 더 안타까운 건 그 여파입니다. 한 번 깨진 신뢰는 그 브랜드 하나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해당 카테고리 자체가 리스크로 분류되고, 후발 주자에게도 문이 좁아지게 됩니다.
이처럼 서구권 유통은 입학시험이 아니라, 장기 생존 게임에 가깝습니다. 첫 PO는 의외로 나올 수 있습니다. 운도 맞고 타이밍이 맞아 트렌드가 받쳐주며, 바이어가 내부 프로모션 슬롯에 끼워 넣을 명확한 이유가 생기면 생각보다 빠르게 시작됩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첫 발주가 끝난 뒤 2차·3차 발주로 이어지고, 매장이 늘고, SKU가 확장되는 흐름을 만들 수 있느냐가 관건인데, 대부분 그 지점에서 멈춥니다. 왜일까요? 이유는 단순합니다. 입학 준비는 해왔는데, 졸업 준비가 안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입점 후에 실제로 요구되는 건 제품의 좋음이 아니라, 운영의 가능성입니다. 공급 안정성, 리드타임, 포장 규격과 라벨링, 가격 질서, 프로모션 가드레일, 반품 및 클레임 대응, 재고 회전, 매대 교육 자료, 리뷰와 콘텐츠의 축적까지 포함한 운영 시스템을 갖춰야 합니다. 제품 하나를 잘 만드는 것과 유통에서 계속 굴러가는 구조를 만드는 것은 완전히 다른 능력입니다.
여기서 제가 가장 예민하게 보는 지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 브랜드나 입학시켰다가 결국 졸업을 못 하면, 그 결과는 브랜드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리테일러는 “그 제품이 안 팔렸다”로 끝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공급처는 검증이 부족했다”로 기억합니다. 유통에서 신뢰는 자산이고, 한 번의 실패는 다음 제안을 훨씬 어렵게 만듭니다.
그래서 저는 단순히 빨리 입점시키는 역할을 목표로 하지 않습니다. 당장 성과가 있어 보이는 길로 끌려가는 것도 경계합니다. 우리가 찾는 건 입점 자체가 목적이 아닌 브랜드입니다. 들어가서 끝까지 버티고, 확장하고, 결국 졸업할 수 있는 브랜드. 다시 말해 유통을 시험이 아니라 커리어로 이해하는 브랜드입니다.
이런 브랜드는 요청부터 다릅니다. “어디 들어가요?”보다 “무엇이 준비돼야 하죠?”를 묻고, “첫 발주가 얼마나 나와요?”보다 “지속적인 발주가 나오는 조건이 뭔가요?”를 묻습니다. “지금 당장 입점시켜 주세요”보다 “리테일 기준에 맞게 구조를 먼저 만들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결국 질문의 수준이 결과의 수준을 만듭니다.
입학은 예쁘게 포장된 순간이지만 졸업은 반복되는 현실입니다. 유통도 같습니다. 한 번 들어가는 건 이벤트일 수 있지만, 계속 팔리는 건 검증된 구조입니다. 그리고 그 구조는 결국 재주문으로 증명됩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브랜드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지금 원하시는 건 입학인가요, 혹은 졸업인가요? 입학만 목표라면, 그건 유통이라기보다 단기 이벤트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졸업을 목표로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느리게 가도 됩니다. 대신 기준을 맞추고, 증거를 쌓고, 2차, 3차 발주가 당연해지는 구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이게 결국 오래 살아남는 유일한 방식입니다.
서구권 유통 시장이 까다롭다고들 말합니다. 저는 그 말이 맞다고 봅니다. 다만 까다로운 이유는 장벽이 있어서가 아니라 기준이 높아서입니다. 들어오는 걸 막기 위한 시장이 아니라, 들어온 뒤 버틸 수 있는지를 보는 시장입니다.
유통은 입학이 끝이 아니라 그때 부터가 시작입니다. 저는 이 시작 이후를 함께 설계할 수 있는 브랜드와 동행하고 싶습니다. 남들이 보기엔 느려 보여도, 끝까지 살아남는 브랜드. 대형 유통의 졸업장을 실제 매출과 재주문으로 증명해낼 브랜드. 입점은 문이 열리는 순간이고, 실력은 지속적인 발주로 증명됩니다.